로스킬레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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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스킬레 대성당은 덴마크 로스킬레에 위치한 12세기와 13세기에 걸쳐 건설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다. 덴마크 왕가의 묘소로 사용되어 38명의 왕족이 안치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최초의 벽돌 고딕 양식 대성당이자 북유럽 기독교 전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주요 건축물로는 여러 왕족의 묘비가 있는 예배당, 1985년에 조성된 프레데리크 9세의 묘소 등이 있으며, 1987년부터 로스킬레 대성당 소년 합창단이 활동하고 있다. 1991년에는 17세기 덴마크 오르간을 재현한 오르간이 설치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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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킬레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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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로스킬레 대성당 |
위치 | 로스킬레 |
국가 | 덴마크 |
교단 | 덴마크 교회 |
이전 교단 | 가톨릭 교회 |
웹사이트 | 로스킬레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봉헌일 | 1225년 |
상태 | 사용 중 |
기능적 상태 | 대성당 |
문화유산 지정 | 보호 기념물 020410-79 |
건축 정보 | |
건축가 | 압살론, 페데르 수네센 |
건축 양식 | 프랑스 고딕 건축 네덜란드 르네상스 르네상스 건축 신고전주의 비잔틴 리바이벌 건축 모더니즘 건축 |
완공 | 1636년 |
길이 | 86m |
너비 | 27m |
높이 | 75.7m |
탑 수량 | 2 |
첨탑 수량 | 2 |
종교 정보 | |
교구 | 로스킬레 교구 |
주교 | 울라 토르비에른 한센 |
봉헌 대상 | 성모 마리아 (이전에는 성 루키우스와 삼위일체) |
유네스코 세계 유산 정보 | |
유네스코 세계 유산 ID | 695 |
등재 연도 | 1995년 |
등재 기준 | 문화: ii, iv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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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158년 발데마르 1세(1131년~1182년)가 덴마크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준 압살론 주교가 임명되었다. 1170년 압살론 주교에 의해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대성당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1280년에 완공되었다. 1225년에 합창단이 완공 및 봉헌되었으며, 이후 55년간 본당 공사가 진행되었다. 1282년 화재로 인해 내부 공사가 지연되었으나, 여러 예배당이 추가되었고 1405년에 탑 공사가 완료되었다.
1413년 마르가레테 1세가 사망한 후 소뢰 클로스터키르케에 안치되었다가 로스킬레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1443년 로스킬레 대화재로 대성당이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1463년 재봉헌되었다. 1460년 크리스티안 1세는 동방박사 예배당을 건축하여(1460년대) 왕실 묘지로 사용하였다.
1536년 종교 개혁으로 인해 로스킬레 대성당은 큰 변화를 겪었다. 1609년에는 백색의 제단이 지어졌고, 1635년 탑 꼭대기에 청동 장식이 추가되었다. 1658년 로스킬레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852년 프레데리크 5세의 방이 완성되었다. 1917년 ~ 1923년 크리스티안 9세의 방이 완성되었다.
1968년 화재 이후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58년에는 프레데리크 9세의 무덤 방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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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이전 교회
하랄드 블루투스 왕은 약 960년경 로스킬레를 덴마크의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고 왕실 농장을 건설, 그 옆에 성삼위일체에 봉헌된 작은 스테이브 교회를 세웠다. 985년 또는 986년 블루투스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그가 세운 교회에 매장되었다. 1026년 크리스마스에는 울프 백작이 카누트 대왕의 하우스칼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로스킬레가 로스킬레 주교의 교구청이 된 시기는 불분명하다. 함부르크 대주교와 갈등이 있었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를 함부르크 대교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로스킬레의 가장 오래된 주교로 알려진 게르브란드는 1022년 덴마크로 항해하던 중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의 사람들에게 붙잡혔으나, 대주교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풀려났다.
에스트리드 스벤스닷테르가 받은 베르길드 자금으로 1026년경 오래된 삼위일체 교회가 철거되고, 간단한 석조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1968년 고고학 발굴 조사 결과, 이 건물은 후대의 석회암 대성당의 기초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1060년에서 1073년 사이 빌헬름 주교가 석회암 대성당 건설을 시작, 1080년경 그의 후계자 스벤드 노르만드가 완공했다. 새로운 대성당은 로스킬레 피오르 주변에서 발견되는 석회암을 사용,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었으며, 서쪽 정면 입구에는 두 개의 탑이 있었다. 북쪽에는 수도사 등을 위한 삼각형 석조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스벤드 노르만드의 후계자인 아놀드는 건물 주위에 담을 추가,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새 대성당 완공 후, 성물을 얻고자 두 명의 사제가 로마로 파견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 루키우스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영원히 로스킬레의 수호성인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했다. 두 사제는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에서 성 루키우스의 두개골을 발견, 덴마크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악마의 공격을 받았으나 성 루키우스의 도움으로 물리쳤다. 성물이 로스킬레에 도착한 정확한 해는 알 수 없지만, 8월 25일에 도착을 기념했다. 성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22년 엘노스 수도사의 저술에 나타난다.
2. 2. 현재 대성당
1170년 압살론 주교에 의해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건축이 시작된 로스킬레 대성당은 1280년에 완공되었다. 1225년에 합창단이 완공 및 봉헌되었으며, 이후 55년간 본당 공사가 진행되었다. 1282년 화재로 인해 내부 공사가 지연되었으나, 여러 예배당이 추가되었고 1405년에 탑 공사가 완료되었다.1413년 마르가레테 1세가 사망한 후 소뢰 클로스터키르케에 안치되었다가 로스킬레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1443년 로스킬레 대화재로 대성당이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1463년 재봉헌되었다. 크리스티안 1세는 동방박사 예배당을 건축하여(1460년대) 왕실 묘지로 사용하였다.
1536년 종교 개혁으로 인해 로스킬레 대성당은 큰 변화를 겪었다. 1609년에는 백색의 제단이 지어졌고, 1635년 탑 꼭대기에 청동 장식이 추가되었다. 1658년 로스킬레 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1968년 화재 이후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58년에는 프레데리크 9세의 무덤 방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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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건축물 및 묘소
옛 왕궁 안에 있는, 벽돌로 지은 높이 85m의 삼랑식 대성당이다. '''성 루카스 대성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지은 것으로 같은 자리에 세워진 네 번째 교회로 추정된다. 15세기 이후 덴마크 왕가의 가묘가 되었는데, 모두 38명의 왕이 묻혀 있다.
==== 예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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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1세 예배당은 1459년 크리스티안 1세의 명으로 대성당에 건립된 웅장한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다.[6] 1462년 봄, 국왕은 예배당 건설에 대한 면죄부를 교황 비오 2세에게 요청했고,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에게 허락받았다.[6] 예배당은 2층 구조로, 아래층은 크리스티안 1세와 도로테아 왕비의 매장 예배당으로, 위층은 국왕이 새로 만든 성모 마리아 수도회(Fellowship of the Mother of God)를 위한 대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두 층은 중앙 화강암 기둥인 왕의 기둥(King's Pillar) 위에 세워져 있으며, 여러 국왕들의 키를 측정한 기록이 남아있다.[6] 크리스티안 1세와 도로테아 왕비의 매장지는 간단한 두 개의 돌로 표시되어 있으며, 예배당 자체가 그들의 묘비로 간주되었다.[6]
예배당에는 크리스티안 3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묘비가 있는데, 이 묘비들은 각각 코르넬리스 플로리스와 게르트 판 에겐에 의해 만들어졌다.[7] 이 묘비들은 벨기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관은 예배당 바닥 아래에 묻혀있다.[7] 예배당의 둥근 천장과 벽은 1460년대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국왕과 왕비의 문장이 동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8] 위층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크리스티안 4세 예배당은 1613년 크리스티안 4세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외관 공사는 로렌츠 판 슈테인빈켈과 한스 판 슈테인빈켈 2세 형제에 의해 1641년에 완공되었다. 예배당 외관은 붉은 벽돌과 톱니형 박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박공 계단마다 그리스도교 미덕을 나타내는 사암 인물상이 놓여 있다. 예배당과 신랑을 구분하는 단철 격자는 1619년 카스파르 핀케가 만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 사후, 그의 기념비는 완성되지 못하고 임시 보관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8세가 베르텔 토르발센에게 크리스티안 4세의 동상 제작을 의뢰하면서 내부 공사가 시작되었고, 빌헬름 마르스트란드와 하인리히 한센이 예배당 내부 장식을 맡아 1870년에 완공되었다.
- 프레데리크 5세 예배당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774년 C. F. 하르스도르프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1825년 C. F. 한센에 의해 완공되었다. 이 예배당은 기존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을 철거하고 지어졌으며, 내부는 고전적인 흰색 벽으로, 외부는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예배당에는 여러 왕족의 관과 석관이 안치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른 묘비 양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 크리스티안 9세 예배당은 1915년 덴마크 헌법 개정 이후 글뤽스부르크 왕가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잔틴 부흥 양식의 예배당이다. 1924년에 완공되었으며, 회색 벽과 돔 지붕을 가진 십자형 건물이다. 예배당에는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왕비, 프레데리크 8세와 루이제 왕비, 크리스티안 10세와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 안드레아스 예배당과 브리기드 예배당은 대성당에 남아있는 유일한 중세 예배당이다. 안드레아스 예배당은 1396년에 건립되었으며, 2010년 피터 브란데스에 의해 재단장되었다. 브리기드 예배당은 1485년에 건립되었으며, 종교 개혁 이후 다양한 교회 재고품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자신의 석관을 안치할 장소로 브리기드 예배당을 선택했다.
==== 매장지 ====
1985년 9월 23일에 개장한 프레데리크 9세의 매장지는 로스킬레 대성당 외부에 조성된 최초의 매장지이다.[10] 로스킬레 피오르(Roskilde Fjord)가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프레데리크 9세의 바람과 크리스티안 9세 예배당에 더 이상 자리가 없었던 점이 건립 이유였다.[11] 1972년 1월 왕이 서거한 후,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지방 자치 단체, 교구 교회 위원회, 덴마크 국립 박물관, 건축 및 조경 문화 재단이 참여한 회의가 같은 해 5월에 열렸다.[12] 1974년에는 지역 보존 및 새로운 매장지 조성 방법을 설명하는 논의 문서가 발표되었으나, 교구 위원회 일부 회원들은 군주를 대성당 내에 매장하는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며 반대했다.[12] 1982년에 해당 지역의 구획 계획이 완료되어 매장지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13]
매장지는 건축가 빌헬름 볼레르트(Vilhelm Wohlert)가 잉거와 요하네스 엑스너와 협력하여 설계했으며, 스벤 하브스테인-미켈센이 디자인한 청동 문이 있는 단순한 노출 벽돌 팔각형 건물이다. 묘비는 조각가 에릭 하이데가 그린란드산 화강암으로 제작했다.[14] 잉그리드 왕비가 2000년에 매장될 때까지 묘는 영구적으로 봉인되지 않았으며, 잉그리드 왕비의 뜻에 따라 매장지 주변에는 왕국 전역의 야생 덩굴과 식물이 심어져 있다.[14]
==== 왕실 묘소 ====


로스킬레 대성당에는 덴마크 왕실의 많은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다.
- 마르그레테 1세(1412년 사망)는 제단 뒤에 안치되어 있다.[15]
- 하랄드 블루투스(985년경 사망)는 북서쪽 기둥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무덤이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 스베인 2세(1076년 사망)는 남동쪽 기둥에 매장되었다.
- 북동쪽 기둥에는 에스트리드 스벤스닷테르(1057년~1073년 사이 사망)가 매장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2003년 DNA 검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이 기둥의 표지는 스베인 2세의 아들 하랄드 3세의 아내 마르가레타 하스비외르нс닷테르를 가리킨다.[15]
- 남서쪽 기둥에는 아세르와 빌헬름(William of Roskilde) 두 주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퍼 3세(1448년 사망)
- 크리스티안 5세(1699년 사망)와 헤세-카셀의 샬럿 아말리에 왕비(1714년 사망)
- 프리드리히 4세(1730년 사망)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루이제 왕비(1721년 사망)
- 크리스티안 1세(1481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1495년 사망)
- 크리스티안 3세(1559년 사망)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공주(1571년 사망)
- 프리드리히 2세(1588년 사망)와 소피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주(1631년 사망)
- 크리스티안 6세(1746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소피 마달레네 왕비(1770년 사망)
- 프리드리히 5세(1766년 사망)와 그의 왕비들인 영국의 루이제(1751년 사망)와 브룬스비크-볼펜뷔텔의 줄리아나 마리아(1796년 사망)
- 크리스티안 7세(1808년 사망)
- 프리드리히 6세(1839년 사망)와 헤세-카셀의 마리 소피 프레데리케 왕비(1852년 사망)
- 크리스티안 8세(1848년 사망)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캐롤라인 아말리 왕비(1881년 사망)
- 프리드리히 7세(1863년 사망)
- 크리스티안 왕세자(1647년 사망)
- 크리스티안 4세(1648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 왕비(1612년 사망)
- 프리드리히 3세(1670년 사망)와 브런스비크-칼렌베르크의 소피 아말리에 왕비(1685년 사망)
- 크리스티안 9세(1818–1906)와 헤세-카셀의 루이제 왕비(1817–1898)
- 프레데리크 8세(1843–1912)와 스웨덴-노르웨이 루이제 왕비(1851–1926)
- 크리스티안 10세(1870–1947)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왕비(1879–1952)
- 프레데리크 9세(1899–1972)와 인그리드 왕비(1910–2000)는 성당 밖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이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배우자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1847~1928)는 1928년 사망 후 이곳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16]
3. 1. 예배당
크리스티안 1세 예배당은 1459년 크리스티안 1세의 명으로 대성당에 건립된 웅장한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다.[6] 1462년 봄, 국왕은 예배당 건설에 대한 면죄부를 교황 비오 2세에게 요청했고, 1474년 교황 식스투스 4세에게 허락받았다.[6] 예배당은 2층 구조로, 아래층은 크리스티안 1세와 도로테아 왕비의 매장 예배당으로, 위층은 국왕이 새로 만든 성모 마리아 수도회(Fellowship of the Mother of God)를 위한 대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두 층은 중앙 화강암 기둥인 왕의 기둥(King's Pillar) 위에 세워져 있으며, 여러 국왕들의 키를 측정한 기록이 남아있다.[6] 크리스티안 1세와 도로테아 왕비의 매장지는 간단한 두 개의 돌로 표시되어 있으며, 예배당 자체가 그들의 묘비로 간주되었다.[6]예배당에는 크리스티안 3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묘비가 있는데, 이 묘비들은 각각 코르넬리스 플로리스와 게르트 판 에겐에 의해 만들어졌다.[7] 이 묘비들은 벨기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관은 예배당 바닥 아래에 묻혀있다.[7] 예배당의 둥근 천장과 벽은 1460년대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국왕과 왕비의 문장이 동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8] 위층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크리스티안 4세 예배당은 1613년 크리스티안 4세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외관 공사는 로렌츠 판 슈테인빈켈과 한스 판 슈테인빈켈 2세 형제에 의해 1641년에 완공되었다. 예배당 외관은 붉은 벽돌과 톱니형 박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박공 계단마다 그리스도교 미덕을 나타내는 사암 인물상이 놓여 있다. 예배당과 신랑을 구분하는 단철 격자는 1619년 카스파르 핀케가 만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 사후, 그의 기념비는 완성되지 못하고 임시 보관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8세가 베르텔 토르발센에게 크리스티안 4세의 동상 제작을 의뢰하면서 내부 공사가 시작되었고, 빌헬름 마르스트란드와 하인리히 한센이 예배당 내부 장식을 맡아 1870년에 완공되었다.
프레데리크 5세 예배당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774년 C. F. 하르스도르프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1825년 C. F. 한센에 의해 완공되었다. 이 예배당은 기존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을 철거하고 지어졌으며, 내부는 고전적인 흰색 벽으로, 외부는 붉은 벽돌로 되어 있다. 예배당에는 여러 왕족의 관과 석관이 안치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른 묘비 양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크리스티안 9세 예배당은 1915년 덴마크 헌법 개정 이후 글뤽스부르크 왕가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잔틴 부흥 양식의 예배당이다. 1924년에 완공되었으며, 회색 벽과 돔 지붕을 가진 십자형 건물이다. 예배당에는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왕비, 프레데리크 8세와 루이제 왕비, 크리스티안 10세와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안드레아스 예배당과 브리기드 예배당은 대성당에 남아있는 유일한 중세 예배당이다. 안드레아스 예배당은 1396년에 건립되었으며, 2010년 피터 브란데스에 의해 재단장되었다. 브리기드 예배당은 1485년에 건립되었으며, 종교 개혁 이후 다양한 교회 재고품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은 자신의 석관을 안치할 장소로 브리기드 예배당을 선택했다.
3. 2. 매장지
1985년 9월 23일에 개장한 프레데리크 9세의 매장지는 로스킬레 대성당 외부에 조성된 최초의 매장지이다.[10] 로스킬레 피오르(Roskilde Fjord)가 보이는 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프레데리크 9세의 바람과 크리스티안 9세 예배당에 더 이상 자리가 없었던 점이 건립 이유였다.[11] 1972년 1월 왕이 서거한 후, 그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지방 자치 단체, 교구 교회 위원회, 덴마크 국립 박물관, 건축 및 조경 문화 재단이 참여한 회의가 같은 해 5월에 열렸다.[12] 1974년에는 지역 보존 및 새로운 매장지 조성 방법을 설명하는 논의 문서가 발표되었으나, 교구 위원회 일부 회원들은 군주를 대성당 내에 매장하는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며 반대했다.[12] 1982년에 해당 지역의 구획 계획이 완료되어 매장지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13]매장지는 건축가 빌헬름 볼레르트(Vilhelm Wohlert)가 잉거와 요하네스 엑스너와 협력하여 설계했으며, 스벤 하브스테인-미켈센이 디자인한 청동 문이 있는 단순한 노출 벽돌 팔각형 건물이다. 묘비는 조각가 에릭 하이데가 그린란드산 화강암으로 제작했다.[14] 잉그리드 왕비가 2000년에 매장될 때까지 묘는 영구적으로 봉인되지 않았으며, 잉그리드 왕비의 뜻에 따라 매장지 주변에는 왕국 전역의 야생 덩굴과 식물이 심어져 있다.[14]
3. 3. 왕실 묘소
로스킬레 대성당에는 덴마크 왕실의 많은 인물들이 안치되어 있다. 마르그레테 1세(1412년 사망)는 제단 뒤에 안치되어 있다.[15] 하랄드 블루투스(985년경 사망)는 북서쪽 기둥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무덤이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스베인 2세(1076년 사망)는 남동쪽 기둥에 매장되었다. 북동쪽 기둥에는 에스트리드 스벤스닷테르(1057년~1073년 사이 사망)가 매장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2003년 DNA 검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새로운 이론에 따르면, 이 기둥의 표지는 스베인 2세의 아들 하랄드 3세의 아내 마르가레타 하스비외르нс닷테르를 가리킨다.[15] 남서쪽 기둥에는 아세르와 빌헬름(William of Roskilde) 두 주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바이에른의 크리스토퍼 3세(1448년 사망), 크리스티안 5세(1699년 사망)와 헤세-카셀의 샬럿 아말리에 왕비(1714년 사망), 프리드리히 4세(1730년 사망)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루이제 왕비(1721년 사망)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크리스티안 1세(1481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1495년 사망), 크리스티안 3세(1559년 사망)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공주(1571년 사망), 프리드리히 2세(1588년 사망)와 소피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주(1631년 사망) 역시 로스킬레 대성당에 묻혀있다.
크리스티안 6세(1746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소피 마달레네 왕비(1770년 사망), 프리드리히 5세(1766년 사망)와 그의 왕비들인 영국의 루이제(1751년 사망)와 브룬스비크-볼펜뷔텔의 줄리아나 마리아(1796년 사망), 크리스티안 7세(1808년 사망)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프리드리히 6세(1839년 사망)와 헤세-카셀의 마리 소피 프레데리케 왕비(1852년 사망), 크리스티안 8세(1848년 사망)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캐롤라인 아말리 왕비(1881년 사망), 프리드리히 7세(1863년 사망)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티안 왕세자(1647년 사망), 크리스티안 4세(1648년 사망)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 왕비(1612년 사망), 프리드리히 3세(1670년 사망)와 브런스비크-칼렌베르크의 소피 아말리에 왕비(1685년 사망) 또한 로스킬레 대성당에 묻혔다. 크리스티안 9세(1818–1906)와 헤세-카셀의 루이제 왕비(1817–1898), 프레데리크 8세(1843–1912)와 스웨덴-노르웨이 루이제 왕비(1851–1926), 크리스티안 10세(1870–1947)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왕비(1879–1952)도 이곳에 안치되었다.
프레데리크 9세(1899–1972)와 인그리드 왕비(1910–2000)는 성당 밖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이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배우자였던 마리아 표도로브나(1847~1928)는 1928년 사망 후 이곳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베드로와 바울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16]
4. 문화적 의의
로스킬레 대성당은 옛 왕궁 안에 있는 벽돌로 지은 높이 85m의 삼랑식 대성당으로, '''성 루카스 대성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같은 자리에 세워진 네 번째 교회로 추정된다. 15세기 이후 덴마크 왕가의 가묘가 되었으며, 모두 38명의 왕이 묻혀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벽돌로 지은 최초의 고딕 양식 대성당이며, 북유럽 기독교 전통의 상징이다.
5. 갤러리
6. 소년 합창단
1987년부터 로스킬레 대성당에는 덴마크를 대표하는 소년 합창단 중 하나인 로스킬레 대성당 소년 합창단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합창단은 교구 청소년 활동의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모든 합창단원들은 일반 학교에 다니지만, 주 2~3회 연습을 위해 모인다. 격년으로 뉴질랜드,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그린란드, 프랑스, 캐나다 등 다양한 목적지로 해외 공연을 떠난다.
7. 오르간
1554년 헤르만 라파엘리스(Hermann Rodensteen)로도 알려진 로덴스틴(Rodensteen) 가문이 제작한 새로운 오르간이 예배를 위해 로스킬레 대성당에 기증되었다.[17] 이 오르간은 1611년, 1654년, 1690년대(?), 1833년, 1926년, 그리고 1950년대에 개조되거나 확장되었다.[17] 1980년대에 음색과 기술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17] 철저한 조사와 악기 내부에 상당량 존재하는 16세기와 17세기 파이프들을 확인한 결과, 17세기 고전적인 덴마크 오르간을 재현하기로 결정했다.[17] 이 작업은 마르쿠센 앤 선(Marcussen & Søn)이 수행하여 1991년에 완료되었다.[17]
8. 등록 기준
로스킬레 대성당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록 기준 (ii)와 (iv)를 충족한다.
참조
[1]
웹사이트
Roskilde Domkirke
https://web.archive.[...]
Historiefaget.dk
2014-12-15
[2]
뉴스
Roskilde-luften forbudt område
http://www.e-pages.d[...]
2011-08-24
[3]
뉴스
Retssag efter kirkebranden
http://www.e-pages.d[...]
2011-08-24
[4]
텍스트
[5]
웹사이트
Margrethe 2.s gravmæle
https://roskildedomk[...]
Roskilde Cathedral
[6]
웹사이트
Roskilde Domkirke
http://www.kulturarv[...]
Kulturarvsstyrelsen
[7]
웹사이트
Kongelige gravmæler i sten
http://www.nationalm[...]
National Museum of Denmark
[8]
웹사이트
Roskilde Cathedral
http://www.astoft2.c[...]
2013-09-11
[9]
웹사이트
Kongelige gravmæler i sten
http://www.nationalm[...]
National Museum of Denmark
[10]
웹사이트
Nyt kongeligt gravsted
http://www.e-pages.d[...]
Politikens Hus
[11]
웹사이트
Bisættes i Roskilde Domkirke
http://www.e-pages.d[...]
Politikens Hus
[12]
웹사이트
Voksende modstand mod det nye gravkammer
http://www.e-pages.d[...]
Politikens Hus
[13]
서적
By og bibliotek
Roskilde Library
[14]
웹사이트
Roskilde Domkirkes historie
https://web.archive.[...]
Roskilde Domkirke
[15]
웹사이트
Last Viking buried with wrong woman
https://archive.toda[...]
The Copenhagen Post
2011-09-19
[16]
웹사이트
http://www.kongper.d[...]
[17]
웹사이트
Roskilde Cathedral – Main organ
http://marcussen-son[...]
Marcussen & Søn organ builders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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